왜 한국인들은 '남을 바꿀 수 있느냐'만 물어보는가
아무래도 교육 쪽에 몸을 담고 있다보니 인간은 변화할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된다. 깊이 생각하기 귀찮은 순간들엔 쿨병 걸린 찐따마냥 단순논리로 '사람은 안 변해'라고 잘라 말할 수도 있지만, 교육이란 인간의 성장과 발달, 큰 틀의 변화를 다루는 필드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든, 언론사 교육연구소에 소속된 직원이든 넓은 범위의 교육계에 속한 이가 사람은 안 변한다는 쿨병에 젖어 있다면 큰 모순에 빠져 있는 셈이다. 백성은 어차피 개돼지라 바뀌지 않는데 뭐하러 배우기 쉬운 글자를 만드냐며 반문하다 세종대왕에게 '너 같은 새끼가 공부하여 백성과 사회를 교화해야 하는 선비가 맞냐'며 크게 꾸지람을 받은 정창손이 생각나기도 한다.
사실 인간은 변한다. 하루하루 늙어가는 것도 변하는 건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아이들이 하루하루 조금씩 바뀌는 모습들을 볼 때마다 큰 경이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과연 변하느냐'에 대한 화두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앞에 수식어가 붙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대로, 나의 욕심에 맞게 인간이 변하느냐. 이것은 사실 논쟁할 가치가 있는 문제일 수도 있다. 개인이 타고나는 선천성보다 인간 대중을 조작하는 인위적 개입을 선호하던 소련의 교육학자 이반 파블로프는 어떤 학생들도 반응 조건화를 통해 개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런 경우엔 내 욕심에 맞게 사람은 변한다고 믿는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란 복잡한 존재이기에 내가 바라는대로, 내 욕심에 맞는 딱 그 모습대로 다른 인간이 바뀌길 바라는 것 자체가 큰 욕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으레 '그런다고 남이 바뀌냐', '사람은 안 바뀐다'라고 잘라 말한다. 내가 한국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는 건 내가 주로 살아온 곳이 한국이고 교류하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성질이 급하고 정치적 기질이 강해서 어떤 것의 본질이나 객관적 성질을 보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어떤 압력을 행사하여 '내가 바라는대로 바꿀 수 있는지'를 중심으로 따져보려 한다. 그래서 당장 '남을 바꿀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바꾸지 못하면 더 깊이 알아볼 필요도 없고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물론 자신과 개성과 기질상 너무나 부딪히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헐뜯기 바쁜 것에 대해선 '다른 인격체를 내 맘에 드는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으니 무의미한 소모적 이야기는 그만두자'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 복합적 의미가 있는 대중적 현상이나 문제 상황들을 다룰 때 '당장 내가 바라는대로 그 사람을 바꿀 수 없으니 더 알아볼 필요도 없다'고 하는 건 모든 걸 정치권력 획득을 통해 단번에 해결하려는 한국인 특유의 정치과잉 조급증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것이 꼭 타인을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개조하는 것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남을 내 맘대로 바꿀 수 없으니 그만 얘기하자고 하는 건 생각의 확장과 사안의 이해를 방해하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한국인들은 '남을 바꿀 수 있느냐'만 물어보는가. 그것은 조급한 기질로 정치질과 타인 통제를 통해서만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는 성미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우리의 생활문화와 정치문화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우리의 생활문화, 정치문화가 단순히 변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하고 싶진 않다. 변하기 쉽지 않더라도 변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쉽게 잘라 말할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는 권해보고 싶다. 그런다고 '남이 변하냐', '세상이 변하냐'고 일축하지 넘어가려 하기보단 우리 사회에 만연히 나타나는 현상들, 우리 사회의 객관적 모습을 되돌아보려는 노력을 경주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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