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의식과 과학적 의식에 대하여

    독서회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어색한 사이가 된 것은 무언가에 골이 잔뜩 났던 내가 '그건 중산층의 허위의식이야'이라고 잘라 말했던 것 때문이었다. 허위의식이란 표현은 기묘한 데가 있다. 그것은 '헛바람이 잔뜩 든 소리다', '개똥 같은 생각이다'의 먹물스러운 표현임과 동시에 '너가 말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놓고 '너는 중산층의 허위의식에 빠진 소리를 하고 있다'는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일단 그와 별 차이가 없는 말을 내뱉었으니 친구와 어색하게 된 것도 어쩔 수 없겠다.

  사실 허위의식이란 말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신, 철학, 문화, 언어 등의 상부구조는 자신이 속한 생산관계, 경제적 토대를 이루는 하부구조의 표현이어야 하는데,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여 자신의 계급적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왜곡된 의식 형태의 상부구조 표현을 허위의식이라 일컫는 것이다. 대충 요약하자면 프로레타리아가 자신의 착취 구조를 인식하지 못하고 부르주아지의 논리를 옹호하는 상황 같은 걸 허위의식이라 한다. 물론 꼭 그렇게 단순한 상황만을 일컫는 말은 아니다. 자신의 실질적 이해와 반대로, 전도된 의식으로 현실을 왜곡하여 인식한다는 얘기인데 마르크스주의에서 다른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이나 가치관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자신이 처한 계급적 착취 관계를 똑바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프로이드의 만남'이란 책이 있다. 에리히 프롬이 쓴 책인데 원제는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Beyond the chains of illusion)'이다. 여기서의 '환상'은 허위의식과 용법이 비슷하다. 소비주의, 이데올로기, 맹목적 욕망 등 현대인이 어떤 심리적·사회적 구조에 갇혀 현실을 전도된 의식으로 인식하게 되고 철저하게 소외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 허위의식을 넘어서기 위해선 마르크스의 지적 도구를 통해 사회, 경제적 억압 구조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프로이드를 통해 무의식적, 심리적 억압 기제의 작동 방식을 알아 노동해방, 인간해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다른 방식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속해 있던 에리히 프롬은 기존 질서를 폭력적 혁명으로 완전히 파괴·전복하지 않고 허위의식, 환상을 인식하여 벗어나는 것으로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 에리히 프롬은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드 심리학을 함께 활용해 고도 소비사회의 현대인의 인간소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철학에 빠져 있던 고등학생 시절에 이 책의 제목이 하도 인상적이라 잘 읽히지 않는 문장들을 붙잡고 책을 읽어나갔던 기억이 있다.
  2020년의 나는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암에 걸려 각종 합병증과 사투하던 엄마는 돌아가셨고, 그동안 난방도 되지 않는 학교 창고에서 자고 부족한 경험과 지식으로 이런저런 투자 공부까지 해가며 모아둔 돈은 불행한 사건에 휘말려 거의 다 털려 있었다. 내 삶은 전복되어 공회전하고 있었다. 나는 사실, 내 삶에 대한 이해와 위로가 필요했다. 그 친구는 악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장 지난 세월 가족의 생활비 문제로 인한 다른 대출도 있었고, 당장 그 친구로부터 진작 대출을 받아 부동산 투자를 알아보고 달려들지 못했던 무지함·무능함에 대한 질타와 재촉을 받을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사실 그 친구는 교육대학교에 흔한 상위 중산층에 속한 집 자녀로 이미 원래 가정부터가 여러 부동산 임대 포트폴리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본가도 일산 킨텍스에 있었고(아마 우리 집과는 몇 배의 곱셈 관계로 가격 차이가 있을 것이다), 여러 경제적 준비가 된 상태에서 결혼 준비 문제만을 앞두고 있던 상황이었다(그 당시 그녀가 이미 결혼을 하고난 다음이었는지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선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발령부터가 내 의지에 벗어난 너무나 고립된 지역이었고, 삶의 기회와 자원으로부터 멀리 비껴간 곳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물론 더 정신 차려 돈을 잘 벌어야되는 상황이겠지만, 그녀가 쓸 수 있는 자원과 선택지는 당연히 나와 차이가 있었다. 
  결국 '내 삶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분수 넘는 훈수를 두느냐'란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허위의식'이란 말로 요약되어 표출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빠에게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결국 이 글은 6년 정도가 지난 다음에 붙이는 그 이유에 대한 변명이라 할 수 있다.
  허위의식의 반대되는 말은 '과학적 의식'이다. 애초에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과학적 사회주의'란 말은 자신의 계급적 상황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오는 혁명의 세계관을 일컫는 것이다. 환상을 넘어서, 세상을 주어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 그것엔 과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좌익들은 그걸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허위의식은 내 삶을 옥죄고 비틀고 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이 만든 망집(妄執)일 수도 있고, 이 세상이 광고 전단지처럼 내뿜고 있는 중산층의 투자선망의 꿈일지도 몰랐다. 나는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지도 못했고, 어떻게 바라봐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나에겐 과학이 필요했다.
  그렇게 결정한 과학은 2024년의 컴퓨터과학이었다. 나는 전복되어 공회전하고 있는 내 삶을 다시 일으켜야 했다. 세상은 데이터로 되어 있었고 그 데이터를 어떻게 조직하고 운용하느냐에 따라 자본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나 세상의 이치의 핵심은 자본이 모이는 곳에 있는 법이라. 세상은 결국 자본의 표현이었고, 가치를 담보하는 것은 고대 제국 이래의 원초적 군사력이 아니라 핵심 정보들을 해킹할 수 있는 암호체계로 변화하고 있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정보과학을 이해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과학적 의식에 도달했는가. 사실 그렇지 못하다. 나는 아직도 손을 더듬어 어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때 그 친구에게 내뱉었던 허위의식이란 말은 사실 내 삶에 대한 신음소리에 가까웠다. 내가 잘난 듯 그 친구에게 허위의식에 빠져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겠는가. 그 친구는 어느 모로 보더라도 나보다 월등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것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함정에 빠져, 나 스스로 허위의식의 바다 속에 익사할 것 같다는 구조 요청에 가까운 내뱉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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