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청년회 국가

  와다 하루키 교수는 80년대의 북한을 '유격대 국가'로 규정했다.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란 구호처럼 주체사상이란 유일사상체계 하에서 전 인민이 유격대원이기를 요구하는 노선을 일컫는 말이다. 김일성은 자신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다는 것에서 정당성을 강하게 주장했고, 자신이 게릴라집단에서 수령으로 군림했던 것처럼 모든 북조선의 주민들이 빨치산들처럼 통제와 제한된 삶의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미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유격대의 수령으로 영원히 섬길 것을 강요한 것이다. 이것은 내전의 혼란을 수반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역동적이었던 남한과 달리, 북조선이 처음부터 소련군과 함께 일사불란한 사회주의 독재 질서를 형성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어떤 모델로 장악하고 리더십 모델을 수립하느냐만 남아 생긴 것이 유격대 국가론이기 때문이다.

  반면 해방(이라 쓰고 사실상 일본 천황의 항복이라 읽어야 한다) 후 남한은 달랐다. 조선총독부는 우리의 생각보다 일본내 위상과 재량권이 높은 독자적 주체였다. 조선총독은 일본의 최고지도자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검증코스 중 하나였을 정도다. 그런 조선총독부조차 미소의 38선 분할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미군이 아닌 송진우·여운형 같은 조선의 민족지도자들을 만나 조선의 치안과 일본인의 안전한 귀국을 협상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으며 여운형과 정백, 박헌영과 같은 조선의 공산당원들이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좌익인사들을 해방하고 소련군의 서울 점령을 환영하는 행사 준비를 했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다. 8월의 폭풍 작전과 함께 한반도로 쇄도한 소련군과 함께 등장해 안정적인 통치 공간을 확보한 북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의 상황과 남한의 혼란한 정국은 이렇게나 달랐다.

  남한은 '국가가 없는 사회'였다. 존 하지 사령관의 미군은 9월 8일에야 조선 땅에 도착했다. 독립운동가로 대표하는 해외 망명객들이 물밀듯이 귀국했고 식민지 사회 안에서 사회지도층이 된 인사들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큰 역할을 하길 기대했다. 그러나 이들은 멀미가 날 정도로 급변하는 시국의 흐름에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미국과 미군정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미국과 미군정을 구분해서 쓴 이유는 실제로 이들이 일치된 세계관과 이해관계에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국무부와 미군정, 그리고 미군정을 지휘하는 맥아더 사령부는 각자 다른 플레이어였다. 이러한 혼란상은 힘의 공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힘의 공백을 채운 것은 두 주체였다. 조선공산당(남로당)의 폭력단과, 그 반대편의 폭력단인 청년단들이었다.

  중위 연령이 47세인 현재 대한민국과 다르게 그 당시 남한 땅은 젊은이들의 땅이었다. 좌익 전체주의 국가인 소련과 달리 일단 표현의 자유와, 정치 참여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며 '일방적인 교통정리'를 하지 않던 미군정 아래에서 원초적 폭력으로 좌익에 대응할 수 있던 것은 피가 끓는 청년들이었다. 독립운동가였던 이범석 장군의 민족청년단(족청), 지청천 장군의 대동청년단,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가족과 재산을 잃고 남쪽으로 자유를 찾아 도망친 이들이 만든 서북청년단, 김두한의 대한민청, 각 대학교의 우익 학생회 등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아무리 미군정이 이승만·김구를 후원하고 교육적, 사회적 배경을 가진 한민당 인력들을 갖다 썼더라도 남한의 공산화를 막지 못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였든 일제시대 식민지 사회에서 경력을 쌓았든 중요한 것은 이 청년들에게 리더십을 인정받고 존경받을 수 있느냐가 정치가로서 존립할 수 있느냐였다. 백범은 1948년 4월 평양에 김일성을 만나러 감으로써 반공 지향이었던 청년들의 신망을 잃었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당시의 청년들은 국가 이전의 폭력이었다. 아직 경찰과 군인 제도가 제대로 서기도 전에, 이들은 부족한 경찰, 군인 병력을 채우기 위해 대거 입대하고 임관했다. 

이승만, 한미동맹 요구 ’청년방위대-학도호국단‘ 창설

  메이지유신을 만들어낸 원초적 힘이 웅번(雄藩)의 하급 사무라이들이었다면 해방정국의 위기를 딛고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가 될 수 있게 한 힘은 해방정국 청년단의 힘이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시대에 지체(遲滯)된 제도 기반, 혹은 제도의 부재(不在) 상황에서 역동적인 사회구성원들의 운동이나 힘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고 그에 어떤 비용이 수반되는가에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6·25전쟁 당시 국민개병에 대한 제도적, 재정적 역량이 대한민국에 없다시피 할 때 68만 명에 이르는 제2국민역 동원을 청년단 기반의 국민방위군으로 하다 국민방위군 최고 간부들의 횡령부정으로 인해 1000명이 넘는 이들이 전장에 가보지도 못한 채 얼어죽고 굶어죽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에 타격을 주기도 했다. 이때 국민방위군 사령관이었던 김윤근 준장은 군대 경험이 없는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사령관 출신이었다. 아직까지도 비판받는 4·3사건 당시의 무자비한 진압과 학살도 제주도 경찰 대신 진압병력으로 들어왔던 청년단(그중에서도 서북청년단이 많았다)의 만행이었다. 

  어쨌든 청년단은 국가가 반란으로 위축되고 압도적인 공산군 병력에 몰려 도망칠 때도 위급한 현장에 뛰어들어 나라를 지키고, 후방에서 국민들을 괴롭히는 빨치산 게릴라들과 위험을 무릅쓰고 맞서 싸운 공이 있다. 주범들을 총살형에 처한 국민방위군 사건에서 재판부는 '이들이 청년단으로서 나라를 지킨 공이 있지만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엄벌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북한의 유격대 국가는 공산주의 체제 특유의 근대화된 영웅설화 제도와 결합해 지속되고 있지만(심지어 중국공산당도 옌안 시절 마오쩌둥의 혁명유적지를 찾는 직원·공무원 연수가 지속되고 있다) 남한의 청년단 국가는 해방정국과 전쟁의 혼란이 잦아들며 안정적인 관료화가 안착되고 5·16 정변으로 인해 등장한 군사정권이 테크노크라트 중심으로 근대화 드라이브를 걸면서 완전히 해체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이 나라가 청년단 국가였다는 것은 기억하는 이도 많이 없다.

  그렇게 격동의 근대화·산업화 시대도 지나가고, 지금은 기존의 관료제와 낡은 제도에 대한 탈관료제적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다. 그것은 교실 바깥에서 이런저런 활동과 실험을 지속하는 소장파 교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이승만 정권 당시의 청년회처럼 제도 외곽의 새로운 에너지로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꺼내봤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해보지도 못한 채 '시대가 다르다'는 말만 들었다. 나름의 재밌자는 화두였는데 너무 쉽게 무시 당해 아쉬움이 커 결국 이 글이 나오게 되었다.

  사실 2020년대와 1940~1950년대니 시대가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전환시대라는 점에서 이 시대들은 유사성이 있다. 새로운 에너지를 담을 제도가 시대에 뒤떨어져 지체되어 있거나 아예 부재할 때, 이러한 새로운 에너지를 탈관료제적 네트워크로 묶어내는 것은 그 시대나 지금 시대나 중요하게 마련이다. 실제로 그런 새 시대의 활력을 기존 제도와 결합해 새로운 시너지를 창출해 새 시대의 건설에 성공했던 역사적 경험이 대한민국 건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기존의 논리·문법과 제도로 해석하고 수용할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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