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4분의 1을 보내며

    어느덧 21세기의 4분의 1인 2025년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2000년대부터 2025년까지, 세계도 한국도, 그리고 나 자신도 정말 많이 변했다. 2000년대는 사회주의를 상대로 했던 자유민주주의 전선의 냉전에서의 승리, 레이건-아버지 부시-클린턴으로 이어지며 IT 버블의 자신만만하고 낙관적이었던 시대가 9·11 테러, '테러와의 전쟁'으로 반전되며 시작됐다. 한국은 90년대까지 이승만의 건국과 군사정권의 부국강병, 문민정부의 민주화라는 거대담론으로 이어지던 한국 현대사가 막을 내리고 DJ가 막 IMF 체제 극복 과정에서 사회 주류 세력을 거칠게 교체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25년이라는 현 시점은 2000년대 자신만만하게 출현했던 '새로운 질서'들이 다시 '낡은 질서'로 몰려 퇴장, 새로운 전환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해였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와 리버럴 세계화의 퇴조(退潮), 자유무역의 후퇴와 패권에 바탕한 관세 무역의 시대, 네오콘•오바마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트럼프 정권과 도광양회•개혁개방의 시대를 뒤로 한 대국굴기•지역패권 추구의 중국몽, 더 노골화된 미중 경쟁, 햇볕정책의 실패와 더 강한 대북제재의 시대, 박근혜 탄핵과 한국 보수의 붕괴, 윤석열 계엄과 탄핵, 역사적 경험이 다른 한국 2030 남자들과 4050세대의 세계관을 둘러싼 치열한 갈등 등으로 나타나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몇 가지 상징적인 장면으로 드러났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2000년대, 2010년대에 정답이라 배우며 어떻게든 수용하여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학습하고 연습해왔던 모든 것들이 뒤집히는 것이기도 했다. 이것은 마치 느닷없이 세상사의 해답지 집필진과 집필 취지, 방향이 한꺼번에 바뀐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2015년 중국은 10년 안에 세계의 제조업을 석권하겠다는 '중국제조(中國制造) 2025'를 발표했다. 중국 지도부가 명시한 핵심 기술 분야 10개 및 2018년에 별도로 추가한 인공지능 분야에서 중국은 일곱 분야에서 세계 1위 기업을 배출했다. 중국 제조업은 막대한 정부 지원을 발판으로 기술 자립을 단계적으로 이루어 한국의 산업 경쟁력을 위협하는 것을 넘어 미국의 기술 패권을 위협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정글만리'의 시대는 가고 중국의 산업 포트폴리오가 한국의 전체 산업 구조의 경쟁자로 나타나 위협하는가 하면, 그러한 중국의 패권 도전을 막기 위해 또 미국이 한국의 산업을 필요로 하는 묘한 장면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가치와 전통의 동맹 외교보다는 새로운 이익과 패권의 현실주의 외교가 강조되는 모습도 보였다.

  소련 붕괴 이후 절대적인 힘을 자랑하던 미국은 자유무역 비교우위 논리에 따른 제조업 아웃소싱 흐름을 뒤집고 거칠게 다시 미국으로 제조업을 불러들이는 리쇼어링에 나섰다. 1인당 소득이 너무나 높아 제조업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은 실리콘밸리의 인공지능으로 지능화하여 메꾼다는 구상이었다. '팔란티어 마피아'라 불리는 트럼프 행정부에 가담한 IT 혁신가들은 국가의 전략적 의사결정을 뒷받침하는 정보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전통적인 안보 엘리트의 구성을 완전 바꿔버렸다. 이들은 미국 정부의 고질적인 문제인 비효율적인 비용 구조를 개혁하겠다고 나서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앳된 개발자가 일론 머스크의 정부효율부에서 활동하는 장면까지 나오기도 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특히 정답이라 믿어 온 세상의 큰 기둥들이 대거 교체 공사를 벌인 것 같은 느낌이다. 새로운 시대의 보편 도덕으로 화려하게 자임하며 온갖 신조어들을 동반하며 만인 위에 군림하는 듯한 '정치적 올바름(PC)'은 차가운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약자에 대한 우대'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이름으로 미화된 시책들은 새로운 부작용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다 공정한 질서를 요구하는 젊은이들의 개혁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이는 한국에서는 2030 남자들과 4050 세대의 충돌로 나타나 지금까지도 첨예하게 부딪히는데, 이들은 서로를 '낡고 뻔한 강약 구도에 갇혀 시대의 문제를 제대로 바라볼 능력을 영영 상실해버린 답답한 구세대'와 '정상적인 삶을 이루지 못하게 돼 부족한 자원과 극심한 경쟁에 도태되어 극우화된 못난 후배들'로 손가락질하고 있는 형편이다.

  국제질서와 국가 단위에서뿐만 아니라, 개인 단위에서의 삶도 너무나 바뀌었다. 내 진로를 결정한 건 90년대 후반에 있었던 IMF의 긴 후유증이었다.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교의 입학 점수가 높아진 것에는 '언제 잘릴지 모르는' 일반적인 근로자가 되기보다는 그래도 어찌됐든 잘리지는 않는 교육공무원이 되는 것이 낫다는 한 세대의 역사적 경험이 쌓인 결과였다. 나 역시 복잡한 시장 경쟁에 내몰리며 비싼 비용을 치르느니 초등교사가 되어 집안을 지탱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세대의 경험에 입각해 내린 진로 결정은 세계급으로 밀어 닥치는 거대한 변혁의 파도 앞에선 크게 뒤집힐 수밖에 없이 무력한 것이었다.

  문재인 정권의 급진적인 최저임금 인상과 부동산 규제, 유동성 확대는 전반적인 물가 수준과 부동산 가격을 크게 상승시켰다.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음에도, 우리들은 몇 년 앞 선배들보다 실질적으론 3분의 2에서 2분의 1 정도의 봉급밖에 받지 못하는 것과 다름 없는 구매력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비단 교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세대 거의 모든 근로 소득자들의 문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직장으로부터 받는 소득의 수준은 크게 줄어든 것이나 다름 없는데, 인권이니 세상이 이전보다 민감해졌느니 하며 요구하는 책임과 법적 분쟁의 위험은 훨씬 커졌다. 선배들은 어쩔 수 없는 관성대로 이전 사회 구조에서 요구되는 사회 관계와 문화를 변함 없이 바랐다. 이는 새로운 세대 간 갈등과 후배 세대의 도전, 갑남을녀 근로 소득자들이 부업을 찾아 적극적으로 황야를 헤매게 되는 새로운 시대의 초상을 낳았다.

  풀 타임 아르바이트를 해도 공무원보다는 많이 버는 시대이며 전업 배달부가 되면 중간 소득 정도를 거두는 개인사업자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IMF로 인해 '평생직장은 없다'며 '공무원이 답'이라며 공무원 시험을 향해 몰려갔던 이들에게 공무원은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잘못 도착한 목적지라는 것만 드러났다. '직업 군인이라도 되겠다'고 군 간부 장기 신청을 위해 치열히 경쟁하던 것이 엄청 오래 전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인터넷 방송과 인공지능 경제의 발전은 더 많은 사람들이 개인 사업자로 변신케 하는 욕구를 일깨웠다. 사람들의 욕망의 구조는 변했고, 자산의 가격은 너무나도 달라졌으며, 인플레이션은 봉급 생활자의 삶을 우습게 만들었다. 그 결과, 이전까지 우리의 현대적 삶을 구성했던 많은 논리와 사회적 관계들이 뒤틀리고 전복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전환 시대에서 멀미가 날 정도의 아노미 현상을 겪으며 삶의 중심을 지키려 하고 있다.

   나 역시도 이 모든 변화를 정면으로 맞으며 컴퓨터과학이라는 새로운 전공으로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하고 있다. IT에 대한 교양 저변의 확장은 인공지능을 이용해 달라지는 세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에 대해 더 다양한 선택의 자유를 제공해줄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전의 나로서는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거나 새로운 사업의 영역을 개척할지도 모르겠다. 21세기의 4분의 1을 지나 보내며 느끼고 있는 것은 세상에 확실한 것은 생각보다 많이 없고, 변화의 규모와 흐름은 우리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선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희일비하며 크게 절망할 것도 크게 방심할 것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중심을 지킬 수 있는 뚝심과 성실함, 그리고 언제든 새로운 도전에 임할 수 있는 능동성과 학습력을 갖추는 데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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