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이었나.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 AI·SW 자문교사로 선정된 김에 인공지능에 대해 공부할 필요성을 느껴 컴퓨터과학을 전공하면 어떠냐고 물었을 때 정부 사업으로 텔레그램을 통한 진로 챗 프로그램을 납품하는데 성공했던 개발자 K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앞으로는 프롬프팅이 더 중요하고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 모든 개발 과정을 대체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사실 막연히 그럴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현업자가 그렇게 말하니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었다. 2023년엔 그런 식의 사고가 유행이었던 걸까. 그리고 나는 큰 사건을 겪고 2024년에 컴퓨터과학과에 편입하게 되었다.
2024년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수업과 개방대학 시스템에 익숙해지는 데 1년을 통째로 다 써버린 한 해가 되었다. 이것저것 끄적여도 보고, 20개 정도의 수업을 들어보고(거의 청강의 느낌), 막연하나마 여기저기 코딩 튜토리얼 프로그램들을 알아보고 하는데 썼으니 마냥 낭비한 1년만은 아니었다고 정신승리를 하고 싶어진다. 2024년이 힘든 한 해였음에도 나름 생산적인 부분이 있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달까.
어쨌든 2024년을 지나 2025년이 되면서 개발과 AI의 풍경은 또 크게 격변했다. 당장에 프롬프팅이 모든 걸 대체할 거라느니, 프롬프트 엔지니어 일자리가 생길 거라느니 했던 말들은 허무맹랑한 우스개소리로 전락했다. 생각해보면 인터넷이 처음 막 대중들에게 일반화되던 시절에도 검색 기술이 중요하다며 인터넷 검색을 특기로 하는 자격증도 나오고 그것이 곧 유망한 직업이 되리란 예측이 나오기도 했었다. 그게 얼마나 우스운 일이었나. 기술의 장벽은 여전히 높고,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은 그저 보편의 개발자에게 필요한 기본 소양이 되었을 뿐이다.
AI가 개발 영역에 깊숙이 들어오면서, 이를 기존의 개발 능력에 더해 전체적인 개발 능력을 증폭시키는게 더욱 중요해졌다. 오늘 읽은 리포트에서는 이미 고도로 발전된 AI 모델을 이용해 소비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AI 엔지니어들의 가치가 더욱 커질 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여기엔 2024년에 컴퓨터과학 편입을 결정하면서 인공지능 전환의 시대에 올라타 창업을 하겠다는 내 비전과 맞닿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이야 더 공부를 해서 유학을 가겠다, 교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하고 있지만 내가 편입을 처음 생각했을 때 가장 크게 염두에 둔 것은 창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지식 자본으로서 무자본 창업을 할 수 있다면, 시골학교에 매몰되어 시간만 보내고 있는 나로서는 그동안 맺혀있던 모든 것을 일거에 돌파할 수도 있겠다는 얄팍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개발자는 다른 이름으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제 세상의 거의 모든 작용은 소프트웨어를 통해 이루어지고, 소프트웨어는 기존 전문직들의 노동과 사회적 지위마저 대체해가고 있다. 이러한 세상이 열리기 전부터 손정의는 소프트웨어의 가치를 알고 소프트뱅크를 창업해 일본 제일의 부자가 되어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을 발굴하기도 했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소프트웨어였고, 인공지능이 보조하는 것은 이 소프트웨어의 원리를 잘 이해하는 개발자다.
기술 수준이 높아질수록 기술 지식의 중요성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고 연동될 수 있는 형태로서의 중간 단계적 지식, 그 지식의 기반과 근본을 이루는 원리에 대한 이해의 중요도는 점점 높아진다. 그것은 지식과 정보가 자본이 되는 현재에는 더욱 그러하고 그 이전의 산업혁명기에도 그러했다.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비전으로 어떤 영역에서 혁신을 불러 일으키냐의 문제일 뿐이다.
2020년 코로나 시절에 읽은 민경국 교수의 <경제사상사 여행>이 생각난다. 거기엔 마르크스의 착취이론과 조지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를 반박하며 기업가 정신을 강조한 아이즈라엘 커즈너가 나온다. 커즈너는 미제스의 경제이론 강의 수업을 듣고 큰 영향을 받았는데, 미제스의 '시장은 과정이다'는 말을 기업가정신론을 통해 이해했다고 한다.
커즈너가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론을 반대한 것은 기업가를 균형을 파괴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커즈너는 '이윤 기회가 없는 균형'에서는 기업가가 나올 수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자동차의 도입이 마차산업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폐물이 된 마차산업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이 배분된 시점, 즉 불균형인 때에 자동차가 도입되었다는 것이 커즈너의 해석이다. 이러한 커즈너의 해석엔 AI 발전에 따른 변화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지금이야말로 다시 되돌아볼 의의가 크다.
커즈너는 이윤이 위험부담에 대한 대가라는 주장을 부인한다. 위험은 생산 과정의 일상적인 비용,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윤을 불확실성에 대한 대가로 이해하는 것도 적합하지 않다. 그 대신에 그는 발견자(창조자)가 소유자여야 한다는 유명한 '발견의 소유자격론'을 개발했다.
이에 따르면 이윤은 '발견의 대가'이다. 또한 자유경쟁은 분배를 균등화하는 힘이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다. 높은 이윤을 가져다주는 혁신이 생기면 다른 기민한 기업가가 기발한 모방이나 대체상품 개발로 그 혁신을 추격한다. 이런 과정에서 그 높은 이윤은 추격자들에게로 이전된다.
연속적인 추격으로 야기되는 이윤의 분배과정이 불평등의 심화를 억제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커즈너에 따르면 이러한 과정을 전반적으로 이끄는 기업가 정신의 이해 없이는 경제발전도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성장과 일자리는 혁신을 위한 민간 부문의 숱한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아이패드, 인터넷 산업의 발전은 모두 시장의 그와 같은 과정의 결과다. 노동가치론에 따른 마르크스의 착취이론은 이러한 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 지금의 세상은 모두가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AI의 보조를 받으며 가치 창출의 혁신을 이루는 혁신가로서의 능력을 요구받는다 할 수 있겠다.
AI 시대의 인재란 단순히 프롬프트 몇 줄로 결과물을 뽑아내는 '사용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부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 기능의 수행만이 될 뿐이다. AI 시대의 인재상은 AI를 자신의 사고와 비전 안에 통합해 더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창조적 발견자’가 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문제를 인식하고, 맥락을 이해하며, 새롭게 조합하는 능력은 여전히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 남는다. 프롬프트는 도구일 뿐, 문제를 설정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이러한 점에서 AI 시대의 진정한 경쟁력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의 원리와 구조를 꿰뚫는 통합적 사고력,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문제 해결로 연결시키는 기업가 정신이다. 커즈너가 말한 ‘발견의 소유자격’처럼,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먼저 발견하고 적절하게 활용하는 사람이야말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고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된다. AI는 단순 대체자가 아니라 인간 능력을 확장시키는 증폭기다.
결국 우리는 AI 시대를 살아가는 기술자이자 철학자, 사용자이자 개척자가 되어야 한다. AI는 우리를 대신해 사고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사유가 깊고 넓어질수록 AI는 더 강력한 도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AI 시대의 인재상은 ‘기술을 이해하는 교양인’, ‘문제를 창조적으로 재구성할 줄 아는 실천가’,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되 불균형을 바로잡는 발견자’일 것이다. 나는 그 인재상에 가까워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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