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컴퓨터과학 1

 나는 대학 시절, 독서회를 중심으로 철학을 깊이 탐구했다. 깊이 탐구했다? 좀 건방져 보이는 표현이다. 많이 모일 때는 일주일에 한 번, 2~3주에 한 번씩 모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와 칸트, 헤겔, 니체와 하이데거, 질 딀뢰즈에 이르기까지 텍스트를 함께 읽고 토론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행복했다. 이렇게 말하면 되게 거창하지만 사실 좋아하는 여자애를 꾸준히 만나고 싶은 동아리였다. 물론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내 여자친구는 같은 독서회의 다른 여학생이었다. 사실 모여서 책을 읽고 하고 싶은 얘기하는 곳이었다. 왜 그맘때의 나는 그 소모임에 마치 모든 우주의 문제가 집중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진지했을까.

  그 시절 나는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꽤나 대담하면서도 굉장히 어설픈 시도였고, 발칙하면서도 얌전한 몸부림이었다. 몸보다는 머리를 많이 썼으니 머리부림이라고 해야하려나. 철학은 그 욕망에 지적 구조와 멋을 더해 주는 학문이었다. 단순히 사고의 깊이를 넓히는 것을 넘어, 철학은 나에게 문제를 정의하고 구성하며, 핵심을 분별하고 개념을 정밀하게 다루는 훈련을 제공했다.

철학책을 읽고 해설서를 읽고, 원전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며 이해하려 애쓰던 그 경험은, 그리고 그것이 세계문학의 고전에 어떻게 구현되었는지(그래서 서양의 Literature는 일본어로 文 일반에 대한 學으로 번역되었는지도 모른다) 추적하려 했던 우리들의 시도는 단지 인문학적 교양을 쌓는 차원을 넘어, 나의 정신을 훈련시키는 과정이었다. '왜'라는 질문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훈련, 모순을 인지하고 이를 개념적으로 정리해가는 과정은 당시에는 막연하게만 느껴졌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이 오늘날 내가 컴퓨터과학을 공부하며 마주치는 개념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실감한다.

컴퓨터과학은 일견 수학적이고 공학적인 영역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기저에 강력한 철학적 사유를 필요로 한다. 데이터의 본질은 무엇인가, 알고리즘이란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석하는가, 인공지능이 스스로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윤리적,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으로 어떤 주제들을 수반하는가. 이 모든 질문은 철학 없이 풀 수 없는 문제들이다. 나는 철학에서 배운 추상화와 분석의 능력이야말로 컴퓨터과학의 근본적인 구조를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큰 무기가 된다고 믿는다.

예컨대, 나는 컴퓨터과학을 공부하면서 자료구조나 알고리즘의 개념이 단지 기술적인 해결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사유의 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스트와 트리, 해시와 그래프는 단지 메모리 안에서 데이터를 정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를 구조화하고 추상화하는 사고의 틀이다. 함수형 프로그래밍의 순수성(purity) 개념은 플라톤과 데카르트로 이어지는 대륙철학의 이원론과 흡사하고,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철학은 나에게 프로그래밍 언어의 문법을 넘어 그것이 담고 있는 사유의 구조를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철학은 내가 기술의 도구화에 함몰되지 않도록 해주는 균형추 역할을 한다. 기술을 공부하다 보면, 자칫 더 빠른 코드, 더 최적화된 구조, 더 편리한 라이브러리에만 매몰되기 쉽다. 그러나 철학은 나로 하여금 "왜 이 문제를 풀고 있는가", "이 기술이 향하는 방향은 어떤 가치를 창출하는가"를 묻도록 만든다. 철학적 성찰은 기술의 방향성과 책임성을 되묻는 역할을 하며, 단순한 기능 구현을 넘어서 사회적·윤리적 책임감을 가진 개발자로 나아가게 해준다.

나는 이 두 영역의 접점을 지향한다. 철학은 내가 사유하는 방식의 근간이고, 컴퓨터과학은 그 사유를 현실로 구현하는 수단이다. 나는 대학 시절의 독서회에서 키운 철학에 대한 애호가 단순한 지적 취미로 머무르지 않고, 지금은 컴퓨터과학이라는 구체적 기술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것은 내 삶의 서사로 흐르는 일종의 문학적 일관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곧 내가 '사유할 줄 아는 기술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습게도, 난 이 욕망을 문장으로 표현할 순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일지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과 데이터 기반의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이 시대에 필요한 개발자는 단지 빠르게 코딩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술의 본질을 이해하고, 사회 속에서 그 기술의 작용을 고민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과 컴퓨터과학의 만남은 단순한 융합이 아니라,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핵심 역량이다. 핵심 역량이라고 하니 역량을 강조하는 교육과정 문서의 문장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역량들은 지식과 인간에 대한 잘못된 가정, 잘못된 인식론과 인간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성취될 수 없는 허상이라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핵심 역량들은 그런 걸 넘어서는 실체로서의 의미다.

나는 철학의 깊이를 갖춘 기술자, 기술을 구현할 줄 아는 철학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짜 리더라고 믿는다. 모두가 꼭 리더가 되어야만 하냐고 묻겠지만, 리더란 어떤 계층과 지위로서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현 시점에서 <국가>를 썼다면 지배자를 어떻게 훈련시켜야 하는가에 대해 그렇게 썼을 것이라 강하게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철학 공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이번엔 추상적인 개념과 개념의 충돌 속에서가 아니라, 코드와 데이터, 알고리즘과 시스템이라는 구체적인 질료 위에서 사고하고 구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나는 철학과 컴퓨터과학, 이 두 세계가 만나 창조적 긴장을 이루는 그 접점에서 나만의 목소리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무(無)의 광야에서 새로운 세계의 등장을 알렸던 목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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